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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마음 곁에 : 잠시 머묾

내 생각이 곧 내가 되는 순간

by baei9 2026. 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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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휴대폰으로 음성메시지를 하나 보냅니다.

길게 답장을 하기 어려운 상황이라 짧게 목소리로 남긴 것입니다.

보내고 나서 문득 다시 재생해 봅니다. 

 

그 순간 조금 낯선 느낌이 듭니다.

“내 목소리가 원래 이렇게 어색했나.”

처음에는 그냥 낯섦입니다.

평소 내가 듣는 내 목소리와 녹음된 목소리가 다르게 들려서 생기는 순간적인 당황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끝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말투가 왜 이렇게 자신 없어 보이지.”

“내가 원래 이렇게 어수선하게 말하나.”

“나는 원래 말을 못하는 사람인가.”

 

한 번 더 듣습니다.

또 한 번 더 듣습니다.

그러다 보면 이제는 음성메시지를 듣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인지 확인하는 일처럼 바뀝니다.

 

처음에는 하나의 녹음이었는데

나 자신에 이미지를 대표하는 것처럼 들리다가

어느 순간에는 ‘이게 바로 나다’라는 느낌이 됩니다.

 

초기불교 경전은 바로 이 순간을 아주 깊게 비춥니다.


오늘의 경전

Majjhima Nikāya 1 (MN 1), 제21문단

 

Pāli

Bhikkhave, bhikkhu

viññāṇaṃ viññāṇato abhijānāti.

Viññāṇaṃ viññāṇato abhiññāya

viññāṇaṃ na maññati

viññāṇasmiṃ na maññati

viññāṇato na maññati

viññāṇaṃ me ti na maññati

viññāṇaṃ nābhinandati.

 

현대어

비구들이여, 수행자는

의식을 의식으로 분명히 안다.

그렇게 분명히 안 뒤에는

그 의식에 대해 그렇게 여기지 않고,

그 의식을 기준으로 생각하지 않으며,

그 의식으로부터 생각하지 않고,

그 의식을 ‘나의 것’이라고 여기지 않으며,

그것을 기뻐하며 붙잡지도 않는다.


그 순간에 실제로 일어난 일

이 문단의 핵심어는 viññāṇa, 의식입니다.

보통 “의식”이라고 번역되지만 여기서의 뜻은 단순히 깨어 있다는 상태보다 훨씬 넓습니다.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인식의 작용 전체를 가리킵니다.

 

문제는 이 인식 작용이 너무 가까워서

우리가 그것을 쉽게 ‘나 자신’으로 착각한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일어난 일은 비교적 단순합니다.

음성메시지를 보냈고 그것을 다시 들었고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여기까지는 하나의 경험입니다.

 

그 다음에 생각이 하나 붙습니다.

“내 목소리가 어색하네.”

여기까지도 아직은 지나가는 생각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은 여기서 한 걸음 더 갑니다.

“나는 원래 어색한 사람이다.”

“나는 원래 자신감 없는 사람이다.”

이 순간부터는 생각 하나가 정체성처럼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경전은 바로 이 동일시의 구조를 보여 줍니다.

의식을 보고, 그 의식을 기준으로 생각하고, 그 의식을 ‘나의 것’으로 여기고

마침내 거기에 붙잡히는 흐름입니다.

 

사람은 단지 한 번의 생각 때문에 아픈 것이 아닙니다.

 

그 생각을 ‘나’라고 믿어 버릴 때 훨씬 깊이 흔들립니다.

 

“나는 늘 부족하다.”

“나는 원래 매력이 없는 사람이다.”

“나는 어디서든 어색한 사람이다.”

 

이런 문장은 처음부터 사실이었던 것이 아니라

반복해서 떠오른 생각이 조금씩 자기 자신처럼 굳어진 결과일 수 있습니다.

 

이 문단의 통찰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나’라고 믿는 것 가운데 일부는 변하지 않는 본질이라기보다

반복된 의식 작용에 대한 동일시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삶에서 이런 일은 생각보다 자주 생깁니다

이 구조는 특별한 사람에게만 생기지 않습니다.

면접을 몇 번 보고 난 뒤

“나는 원래 면접에 약한 사람”이라고 느끼는 일도 그렇습니다.

 

연애에서 몇 번 서툰 대화를 나눈 뒤

“나는 사랑을 잘 주고받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믿게 되는 일도 그렇습니다.

 

아이와 다투고 난 뒤

“나는 좋은 부모가 아닌 사람”이라는 생각이 오래 남는 일도 그렇습니다.

 

발표 중 한 번 말이 꼬인 뒤

“나는 사람들 앞에 서면 작아지는 사람”이라고 자기 자신을 규정하는 일도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사건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생각이 붙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이 반복되면 나중에는 그것이 ‘원래 나’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실제 사건보다

그 사건을 통해 만들어진 자기상 때문에 더 오래 힘들어합니다.

 

상처가 깊은 이유가

일 그 자체 때문만이 아니라

그 일을 통해 내가 누구라고 믿게 되었는지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주 놓치는 한 가지

사람들은 보통

“나는 이렇게 느낀다”와

“나는 이런 사람이다”를 쉽게 이어 붙입니다.

하지만 이 둘은 같은 문장이 아닙니다.

 

“지금 나는 위축된다”는 하나의 상태입니다.

 

“나는 원래 위축되는 사람이다”는 그 상태를 자기 존재 전체로 확장한 해석입니다.

 

문제는 대개 여기서 생깁니다.

상태는 지나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체성으로 굳어진 문장은 오래 남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고통이 커질 때는

사건보다 생각을,

생각보다 정체성 문장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할 때가 많습니다.

 

지금 괴로운 것은 실제의 나일까요.

아니면 반복되어서 이제는 나처럼 느껴지는 문장일까요.

 


오늘 한 번 해볼 일

오늘 마음을 무겁게 하는 문장이 떠오른다면

그 문장 앞에 작은 말을 하나 붙여 보십시오.

 

“나는 원래 부족하다”

라는 생각이 떠오르면 이렇게 바꾸어 봅니다.

“지금 ‘나는 원래 부족하다’는 생각이 떠오르고 있다.”

 

“나는 매력이 없는 사람이다” 라는 문장이 올라오면

“지금 그런 문장이 내 마음 안에서 반복되고 있다.”

 

이 변화는 아주 작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중요한 차이를 만듭니다.

앞의 문장에서는 생각과 내가 붙어 있습니다.

뒤의 문장에서는 생각이 내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현상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생각의 내용을 고치지 말고

그 생각이 어떤 목소리로 반복되는지 들어보는 것입니다.

 

비난하는 목소리인지,

두려워하는 목소리인지,

지쳐 있는 목소리인지.

내용을 바로 믿지 않고 그 말투와 결을 들어보면

 

생각이 ‘나’가 아니라

내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흐름으로 조금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경전 읽기

Viññāṇa

보통 “의식”이라고 번역됩니다.

하지만 이 문단에서는 사람이 아주 쉽게 ‘나’로 오해하게 되는

인식의 중심 감각까지 함께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보고 있다.”

“내가 느끼고 있다.”

“내가 생각하고 있다.”

이 감각 자체는 자연스럽습니다.

문제는 그 위에 떠오르는 생각과 느낌까지

곧바로 ‘이게 바로 나다’라고 붙들어 버리는 데 있습니다.

 

Abhijānāti

“분명히 안다”는 것은

의식을 없앤다는 뜻이 아닙니다.

의식을 의식으로 아는 것,

즉 보고 있는 작용, 느끼는 작용, 생각하는 작용이

곧바로 실체적인 ‘나’는 아닐 수 있음을 분명히 보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 문단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나’라고 믿는 것은 처음부터 단단한 실체라기보다

반복된 생각과 의식에 대한 동일시의 결과일 수 있습니다.


오늘 그리고 지금

지금 마음속에 오래 반복되는 문장이 하나 있을 수 있습니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다.”

“나는 늘 이렇다.”

“이건 그냥 내 본모습이다.”

 

그럴 때 오늘은 그 문장을 곧바로 부정할 필요도 없고,

억지로 더 좋은 문장으로 바꿀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이렇게만 물어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정말 변하지 않는 나일까요.

아니면 오래 반복되어서 이제는 나처럼 느껴지는 생각일까요.

 

그 질문 하나만으로도 마음은 조금 더 숨을 쉬게 됩니다.

 

생각이 곧 나 자신은 아닐 수 있다는 가능성,

그 가능성이 열리는 순간

사람은 자기에게 조금 더 다정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바로 그 다정함이

생각보다 더 깊은 변화를 시작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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